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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메트 에르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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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이자, 애틀랜틱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였다. 그는 재즈 음악을 통해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1947년 애틀랜틱 레코드를 설립하여 R&B, 소울, 록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에르테군은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자선 활동을 통해 미국과 터키 간의 문화 교류를 증진했다. 그는 2006년 롤링 스톤스 콘서트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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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메트 에르테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흐메트 에르테군 (1960년경)
아흐메트 에르테군 (1960년경)
본명아흐메트 자흐레틴 세부히 에르테귈
별칭A. 누게트레
출생일1923년 7월 31일
출생지이스탄불, 터키
사망일2006년 12월 14일
사망지뉴욕 시, 미국
활동 시작1944년
활동 종료2006년
출신지워싱턴 D.C., 미국
음악 경력
장르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
직업레코드 레이블 경영자
음반 프로듀서
송라이터
작곡가
자선가
악기해당 사항 없음
레이블애틀랜틱
관련 활동해당 사항 없음
웹사이트해당 사항 없음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Ahmet Ertegün

2. 초기 생애 및 배경

1942년 에르테군 가족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1923년 7월 31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터키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이자 터키 대사를 지낸 뮈니르 에르테군이었고, 어머니는 음악가였다.[3][4] 형인 네수히 에르테군은 그에게 재즈 음악을 소개해 주었으며, 9살 때 런던에서 듀크 엘링턴캡 캘러웨이 오케스트라 공연을 함께 보기도 했다.[5]

1935년, 에르테군 가족은 아버지 뮈니르 에르테군이 미국의 터키 공화국 대사로 임명되면서 미국으로 이주했다.[6] 에르테군은 워싱턴 D.C.의 흑인 구역에서 듀크 엘링턴, 캡 캘러웨이,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등 유명 음악가들의 공연을 보며 음악적 열정을 키웠다. 그는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의 랜든 스쿨에 다녔지만, 하워드 극장에서 진정한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7][8] 또한, 미국 흑인들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며, 이슬람교 신자라는 이유로 유럽에서 차별받던 터키인들의 상황을 떠올리기도 했다.[7]

에르테군은 형 네수히와 함께 밀트 개블러의 코모도어 뮤직 샵에서 방대한 양의 재즈 및 블루스 음반을 수집하고, 레나 혼, 젤리 롤 모턴 등 유명 음악가들과 교류했다. 레스터 영, 시드니 베체 등 재즈 거장들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뉴올리언스할렘을 여행하며 음악적 안목을 넓혔다.

1944년 애나폴리스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를 졸업하고[3]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중세 철학 대학원 과정을 밟던 중,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들이 터키로 돌아갔지만, 에르테군은 미국에 남아 음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2. 1. 터키에서의 유년 시절



아흐메트 에르테군의 증조부 이브라힘 에뎀 에펜디는 위스퀴다르 외즈베클레르 테케시의 마지막 셰이크였다.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터키 대사 뮈니르 에르테군과 하이륀니사 뤼스템의 차남으로, 1923년 7월 31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 뮈니르 에르테군은 터키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정치가였다. 어머니 하이륀니사는 건반 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는 뛰어난 음악가로, 아흐메트와 그의 형 네수히 에르테군이 듣는 당시 인기 음반을 구입했다.[4] 형 네수히는 그에게 재즈 음악을 소개했으며, 9살 때 듀크 엘링턴캡 캘러웨이 오케스트라를 런던에서 볼 수 있게 했다.[5] 1935년, 가족은 미국의 터키 공화국 대사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6] 아흐메트는 14살 때 어머니에게 음반 커팅 기계를 선물받아, 기악 음반에 작곡과 가사를 추가했다.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에르테군은 워싱턴 D.C.의 흑인 구역 중심부에서 듀크 엘링턴, 캡 캘러웨이,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등 인기 연주자들을 자주 보았다. 그는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의 랜든 스쿨에 다녔지만, "저는 하워드에서 진짜 교육을 받았습니다."라고 농담하며 워싱턴 D.C.의 하워드 극장을 언급했다.[7][8] 에르테군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미국 흑인들의 상황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고, 터키인들이 노예였던 적은 없지만, 이슬람교 신념 때문에 유럽 내에서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무자비한 차별의 희생자들에게 즉각적인 공감을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7]

에르테군 형제는 밀트 개블러의 코모도어 뮤직 샵을 자주 방문, 15,000장 이상의 재즈 및 블루스 78rpm 컬렉션을 모았고, 엘링턴, 레나 혼, 젤리 롤 모턴 등과 친분을 맺었다. 아흐메트와 네수히는 레스터 영, 시드니 베체 등 재즈 거장들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뉴올리언스할렘을 여행하며 음악적 취향을 키웠다.

1944년 애나폴리스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를 졸업한 에르테군은 같은 해 11월 아버지 뮈니르 에르테군이 사망하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USS ''미주리''에 그의 시신을 터키로 운송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는 소련의 터키에 대한 잠재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과 터키 간의 우정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 사망 당시 에르테군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중세 철학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2. 2. 미국으로의 이주



1935년,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아버지 뮈니르 에르테군이 미국의 터키 공화국 대사로 임명되면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6]

에르테군은 워싱턴 D.C.의 흑인 구역에서 듀크 엘링턴, 캡 캘러웨이,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등 인기 연주자들의 공연을 자주 보았다. 그는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의 사립 학교인 랜든 스쿨에 다녔지만, 하워드 극장에서 "진짜 교육"을 받았다고 농담했다.[7][8] 에르테군은 미국 흑인들의 차별받는 상황에 공감했는데, 터키인 역시 이슬람교 신념 때문에 유럽에서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7]

에르테군과 그의 형은 밀트 개블러의 코모도어 뮤직 샵에서 15,000장 이상의 재즈 및 블루스 78rpm 컬렉션을 모았고, 엘링턴, 레나 혼, 젤리 롤 모턴 등과 친분을 맺었다. 이들은 레스터 영, 시드니 베체 등 재즈 거장들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뉴올리언스할렘을 여행하며 음악적 안목을 키웠다.

1944년, 에르테군은 애나폴리스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중세 철학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같은 해 11월, 아버지 뮈니르 에르테군이 사망하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USS ''미주리''로 그의 시신을 터키로 운송하여 미국과 터키 간의 우호를 과시했다. 이는 소련의 터키에 대한 잠재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족들이 터키로 돌아간 후, 에르테군과 형 네수히는 미국에 남았다. 네수히는 로스앤젤레스로, 아흐메트는 워싱턴에 머물며 음반 사업을 시작했다.

2. 3. 교육 및 음악적 관심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터키 대사 뮈니르 에르테군과 하이륀니사 뤼스템의 차남이었다. 그의 형 네수히는 그에게 재즈 음악을 소개했으며, 9살 때 듀크 엘링턴캡 캘러웨이 오케스트라를 런던에서 볼 수 있게 했다.[5] 1935년, 에르테군 가족은 미국의 터키 공화국 대사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6]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에르테군은 워싱턴 D.C.의 흑인 구역 중심부에서 듀크 엘링턴, 캡 캘러웨이,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최고 인기 연주자들을 자주 보았다. 그는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 있는 랜든 스쿨에 다녔지만, "저는 하워드 극장에서 진짜 교육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미국 흑인들의 상황과 차별에 공감했다.[7][8]

에르테군 형제는 밀트 개블러의 코모도어 뮤직 샵을 자주 방문, 15,000장 이상의 재즈 및 블루스 78rpm 컬렉션을 모았으며, 엘링턴, 레나 혼, 젤리 롤 모턴 등과 친분을 맺었다. 또한 레스터 영, 시드니 베체 등 재즈 거장들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뉴올리언스할렘을 여행하며 음악적 취향을 키웠다.

1944년 애나폴리스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를 졸업한 에르테군은[3] 같은 해 11월 아버지가 사망했다. 1946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USS ''미주리''에 그의 시신을 터키로 운송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소련의 터키에 대한 잠재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과 터키 간의 우정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 사망 당시 에르테군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중세 철학 대학원 과정을 수강하고 있었다.

3. 초기 경력

아흐메트 (왼쪽)는 1960년경 그의 형제 네수히와 함께


1946년, 에르테군은 국립 레코드사의 A&R 담당이자 치과 학생인 허브 에이브람슨과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가스펠 음악, 재즈 음악, R&B 음악을 위한 새로운 독립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49년, 프로페서 롱헤어의 첫 번째 녹음을 포함하여 22개의 실패한 음반 발매 후, 애틀랜틱 레코드는 스틱 맥기의 "Drinkin' Wine Spo-Dee-O-Dee"로 첫 번째 메이저 히트를 기록했다. 1950년대에 제리 웩슬러와 에르테군의 형제 네수히가 파트너로 합류하며 회사는 확장되었다.

에르테군 형제와 마찬가지로, 비하리 형제와 체스 레코드 형제를 포함한 많은 독립 레코드 임원들이 이민자 출신이었다. 에르테군 형제는 재즈 감각을 R&B에 도입하여, 전국 각지에서 온 블루스와 재즈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애틀랜틱 레코드는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함으로써 당시 주요 레이블의 우위를 도전하는 데 기여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최고의 리듬 앤 블루스 레이블이 되었고, 혁신적인 엔지니어/프로듀서 톰 다우드의 도움으로 고품질 녹음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에르테군은 블루스의 고전적인 곡들을 여러 곡 썼는데, 여기에는 가명 "A. 누제트레"("에르테군"을 거꾸로 한 것)로 쓴 "Chains of Love"와 "Sweet Sixteen"이 포함되었다. 그는 또한 레이 찰스의 히트곡 "Mess Around"를 썼다. 에르테군은 제리 웩슬러, 작곡가 제시 스톤과 함께 빅 조 터너의 "Shake, Rattle and Roll"에서 코러스를 맡았다.

1958년, 에르테군은 에이브람슨을 애틀랜틱 레코드의 사장으로 대체했고, 에이브람슨은 재정적 지분을 판매한 후 회사를 떠났다.[1]

3. 1. 애틀랜틱 레코드 설립

1946년, 에르테군은 국립 레코드사의 A&R 담당이자 치과 학생인 허브 에이브람슨과 친구가 되었고, 가스펠 음악, 재즈 음악, R&B 음악을 위한 새로운 독립 레코드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가족 치과 의사인 바흐디 사비트 박사의 자금 지원을 받아 1947년 9월 뉴욕시에서 애틀랜틱 레코드를 설립했다.[1] 첫 번째 녹음 세션은 그해 11월에 열렸다.[1]

1949년, 프로페서 롱헤어의 첫 번째 녹음을 포함하여 22개의 실패한 음반 발매 후, 애틀랜틱은 스틱 맥기의 "Drinkin' Wine Spo-Dee-O-Dee"로 첫 번째 메이저 히트를 기록했다.[1] 회사는 1950년대에 확장되었고, 제리 웩슬러와 나중에 에르테군의 형제 네수히가 파트너로 합류했다.[1] 애틀랜틱에서 녹음한 히트 아티스트로는 루스 브라운, 빅 조 터너, 더 클로버스, 더 드리프터스, 더 코스터스, 레이 찰스 등이 있었다.[1]

에르테군 형제와 마찬가지로, 많은 독립 레코드 임원들이 비하리 형제와 체스 레코드 형제를 포함한 이민자 출신이었다.[1] 에르테군 형제는 재즈 감각(그리고 많은 재즈 아티스트)을 R&B에 도입하여, 전국 각지에서 온 블루스와 재즈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1] 애틀랜틱은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함으로써 당시 주요 레이블의 우위를 도전하는 데 기여했다.[1] 불과 몇 년 만에 최고의 리듬 앤 블루스 레이블이 되었고, 혁신적인 엔지니어/프로듀서 톰 다우드의 도움으로 고품질 녹음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1] 애틀랜틱은 스테레오 음향으로 녹음한 최초의 레이블 중 하나였으며, 1957년에는 멀티트랙 녹음을 사용한 최초의 레코드 회사였다.[1]

에르테군 본인은 블루스의 고전적인 곡들을 여러 곡 썼는데, 여기에는 가명 "A. 누제트레"("에르테군"을 거꾸로 한 것)로 "Chains of Love"와 "Sweet Sixteen"이 포함되었다.[1] 이 곡들은 먼저 빅 조 터너에 의해 표현되었고 B.B. 킹의 레퍼토리에서 계속되었다.[1] "Chains of Love"는 팻 분에게 인기 있는 히트곡이었다.[1] 그는 또한 레이 찰스의 히트곡 "Mess Around"를 썼으며, 이 곡의 가사는 "Pinetop's Boogie Woogi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1] 그는 "A. 누제트레"로 변경하기 전에 잠시 크레딧에 "누기"로 표기되었다.[1] 에르테군은 웩슬러, 작곡가 제시 스톤과 함께 터너의 "Shake, Rattle and Roll"에서 외치는 코러스 그룹의 일원이었다.[1] 그는 또한 1956년 더 클로버스의 히트곡인 "Ting A Ling"을 썼으며, 이는 버디 홀리가 커버했다.[1] 또 다른 클로버스 곡인 "Fool, Fool, Fool"은 케이 스타의 히트곡이었다.[1] 그의 "Don't Play That Song (You Lied)"는 아레사 프랭클린, 벤 E. 킹이 녹음했으며, 아드리아노 첼렌타노가 국제 버전으로 녹음했다.[1]

더 클로버스의 "Lovey Dovey"의 가사 다섯 줄은 스티브 밀러가 그의 히트곡 "The Joker"에 사용했다.[1] 다른 누제트레 리듬 앤 블루스 히트곡으로는 더 드리프터스의 "Whatcha Gonna Do", 루스 브라운의 "Wild, Wild Young Men", 레이 찰스의 "Heartbreaker", 더 클로버스의 "Middle of the Night", 빅 조 터너의 "Ti-Ri-Lee", 라번 베이커의 "Story of My Love"가 있다.[1] 이 곡들은 모두 원래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다.[1] 그는 또한 핀란드 가수 이리나 밀란을 위해 Ahmet Ertegun이라는 이름으로 "Missä Olit Silloin (Dawn in Ankara)"를 썼다.[1]

1958년, 에르테군은 에이브람슨을 애틀랜틱의 사장으로 대체했고, 에이브람슨은 재정적 지분을 판매한 후 회사를 떠났다.[1]

3. 2. 초기 성공과 R&B 음악 개척



1946년, 에르테군은 국립 레코드사의 A&R 담당이자 치과 학생인 허브 에이브람슨과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가스펠 음악, 재즈 음악, R&B 음악을 위한 새로운 독립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가족 치과 의사인 바흐디 사비트 박사의 자금 지원을 받아 1947년 9월 뉴욕시에서 애틀랜틱 레코드를 설립했다. 첫 번째 녹음 세션은 그해 11월에 열렸다.[1]

1949년, 프로페서 롱헤어의 첫 번째 녹음을 포함하여 22개의 실패한 음반 발매 후, 애틀랜틱은 스틱 맥기의 "Drinkin' Wine Spo-Dee-O-Dee"로 첫 번째 메이저 히트를 기록했다. 1950년대에 제리 웩슬러와 에르테군의 형제 네수히가 파트너로 합류하며 회사는 확장되었다. 애틀랜틱에서 녹음한 히트 아티스트로는 루스 브라운, 빅 조 터너, 더 클로버스, 더 드리프터스, 더 코스터스, 레이 찰스 등이 있었다.[1]

에르테군 형제와 마찬가지로, 비하리 형제와 체스 레코드 형제를 포함한 많은 독립 레코드 임원들이 이민자 출신이었다. 에르테군 형제는 재즈 감각(그리고 많은 재즈 아티스트)을 R&B에 도입하여, 전국 각지에서 온 블루스와 재즈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애틀랜틱은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함으로써 당시 주요 레이블의 우위를 도전하는 데 기여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최고의 리듬 앤 블루스 레이블이 되었고, 혁신적인 엔지니어/프로듀서 톰 다우드의 도움으로 고품질 녹음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애틀랜틱은 스테레오 음향으로 녹음한 최초의 레이블 중 하나였으며, 1957년에는 멀티트랙 녹음을 사용한 최초의 레코드 회사였다.[1]

에르테군은 블루스의 고전적인 곡들을 여러 곡 썼는데, 여기에는 가명 "A. 누제트레"("에르테군"을 거꾸로 한 것)로 쓴 "Chains of Love"와 "Sweet Sixteen"이 포함되었다. 이 곡들은 먼저 빅 조 터너에 의해 표현되었고 B.B. 킹의 레퍼토리에서 계속되었다. "Chains of Love"는 팻 분에게 인기 있는 히트곡이었다. 그는 또한 레이 찰스의 히트곡 "Mess Around"를 썼으며, 이 곡의 가사는 "Pinetop's Boogie Woogi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A. 누제트레"로 변경하기 전에 잠시 크레딧에 "누기"로 표기되었다. 에르테군은 웩슬러, 작곡가 제시 스톤과 함께 터너의 "Shake, Rattle and Roll"에서 외치는 코러스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또한 1956년 더 클로버스의 히트곡인 "Ting A Ling"을 썼으며, 이는 버디 홀리가 커버했다. 또 다른 클로버스 곡인 "Fool, Fool, Fool"은 케이 스타의 히트곡이었다. 그의 "Don't Play That Song (You Lied)"는 아레사 프랭클린, 벤 E. 킹이 녹음했으며, 아드리아노 첼렌타노가 국제 버전으로 녹음했다.[1]

더 클로버스의 "Lovey Dovey"의 가사 다섯 줄은 스티브 밀러가 그의 히트곡 "The Joker"에 사용했다. 다른 누제트레 리듬 앤 블루스 히트곡으로는 더 드리프터스의 "Whatcha Gonna Do", 루스 브라운의 "Wild, Wild Young Men", 레이 찰스의 "Heartbreaker", 더 클로버스의 "Middle of the Night", 빅 조 터너의 "Ti-Ri-Lee", 라번 베이커의 "Story of My Love"가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원래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다. 그는 또한 핀란드 가수 이리나 밀란을 위해 Ahmet Ertegun이라는 이름으로 "Missä Olit Silloin (Dawn in Ankara)"를 썼다.[1]

1958년, 에르테군은 에이브람슨을 애틀랜틱의 사장으로 대체했고, 에이브람슨은 재정적 지분을 판매한 후 회사를 떠났다.[1]

3. 3. 작곡 활동

에르테군은 "A. 누제트레"("에르테군"을 거꾸로 한 것)라는 가명으로 블루스 곡들을 작곡했다. 빅 조 터너가 처음 부른 "Chains of Love"와 "Sweet Sixteen"은 이후 B.B. 킹의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4] "Chains of Love"는 팻 분에게도 인기 있는 히트곡이었다.[4] 그는 레이 찰스의 히트곡 "Mess Around"를 작곡했는데, 이 곡의 가사는 "Pinetop's Boogie Woogie"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4] 에르테군은 잠시 크레딧에 "누기"로 표기되기도 했다.[4]

에르테군은 제리 웩슬러, 작곡가 제시 스톤과 함께 빅 조 터너의 "Shake, Rattle and Roll"에서 코러스를 맡았다.[4] 또한 1956년 더 클로버스의 히트곡 "Ting A Ling"을 썼으며, 이 곡은 버디 홀리가 커버했다.[4] 더 클로버스의 또 다른 곡 "Fool, Fool, Fool"은 케이 스타의 히트곡이었다.[4] 그의 "Don't Play That Song (You Lied)"는 아레사 프랭클린, 벤 E. 킹이 녹음했으며, 아드리아노 첼렌타노가 국제 버전으로 녹음했다.[4]

스티브 밀러는 더 클로버스의 "Lovey Dovey" 가사 일부를 자신의 히트곡 "The Joker"에 사용했다.[4] 이 외에도 누제트레 명의의 리듬 앤 블루스 히트곡으로는 더 드리프터스의 "Whatcha Gonna Do", 루스 브라운의 "Wild, Wild Young Men", 레이 찰스의 "Heartbreaker", 더 클로버스의 "Middle of the Night", 빅 조 터너의 "Ti-Ri-Lee", 라번 베이커의 "Story of My Love"가 있다.[4] 이 곡들은 모두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다.[4] 그는 핀란드 가수 이리나 밀란을 위해 Ahmet Ertegun이라는 이름으로 "Missä Olit Silloin (Dawn in Ankara)"를 작곡하기도 했다.[4]

4. 결혼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두 번 결혼했다. 1953년 얀 홀름과 결혼하여 1956년경 이혼했고, 1961년에는 미카 그레시안과 결혼하여 2006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두 번의 결혼 모두 자녀는 없었다.[11][12][13]

4. 1. 얀 홀름과의 결혼 (1953-1956)

1953년 1월 6일, 에르테군은 스웨덴계 미국인 배우이자 패션 모델, 세트 디자이너였던 얀 홀름(옛 성은 엔스탐)과 결혼했다. 얀 홀름은 칼 엔스탐의 딸이자 에드워드 월터 래스번의 전 부인이었다. 에르테군과 얀 홀름 사이에 자녀는 없었으며, 1956년경에 이혼했다.[11][12]

4. 2. 미카 에르테군과의 결혼 (1961-2006)

1961년, 에르테군은 루마니아의 의사이자 정치가인 게오르그 바누의 딸이자 스테판 그레시안의 전 부인이었던 요아나 마리아 "미카" 그레시안과 결혼했다.[12][13] 미카는 이후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었고, 인테리어 회사 MAC II의 공동 창업자가 되었다. 이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12][13]

5. 후기 경력

1969년 애틀랜틱이 키니 기업에 편입되고 나중에는 타임 워너의 일부가 되었지만, 애틀랜틱 레코드는 에르테군을 수장으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그는 프로듀서로서 직접 관여하는 정도는 줄었지만, 새로운 기업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닥터 존과 The Honeydrippers와 같은 일부 록 음악 관련 활동을 계속 프로듀싱했다.

에르테군은 카니 카라카와 네이 연주자 아카군두즈 쿠트바이가 참여한 "Music of the Whirling Dervishes"의 녹음 및 발매를 애틀랜틱 레이블에서 승인했다.

5. 1. 소울 음악과 록 음악의 발전

1960년대에 애틀랜틱은 멤피스의 Stax Records와 같은 지역 레이블과 협력하여 소울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 벤 E. 킹, 솔로몬 버크, 오티스 레딩, 샘 앤 데이브, 퍼시 슬레지, 아레사 프랭클린, 윌슨 피켓과 같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에르테군은 1965년 웨스트햄프턴 나이트클럽에서 The Rascals를 발견하고 애틀랜틱과 계약을 맺으면서 미국에 이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4년 동안 13개의 Top 40 싱글 차트에 올랐고 199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에르테군은 레드 제플린데모를 듣고 그들의 성공을 확신하여 즉시 계약을 체결했다. 1970년대 후반 디스코 시대에 에르테군은 프로듀서 실비오 탄크레디를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했다. 애틀랜틱 레코드는 스티븐 스틸스의 녹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데이비드 게펜과 협상한 후, 게펜은 다시 컬럼비아 레코드클라이브 데이비스와 협상하여 데이비드 크로스비그레이엄 내시의 권리를 애틀랜틱 레코드로 이전했고, 그는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와 계약을 맺었으며, 삼인조가 닐 영을 투어에 합류하도록 설득하여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을 결성했다.[14]

에르테군은 믹 재거와 직접 협상하여 롤링 스톤스와 애틀랜틱 간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그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에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90125'' 앨범의 방향에 대해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와 강력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스콰이어와 그룹이 "Owner of a Lonely Heart"로 히트 싱글을 제작하도록 장려했다.

1987년 에르테군은 자신이 설립자 중 한 명인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0년대 후반, 보니 레이트 등의 지원을 받아 그는 과소 평가된 블루스 아티스트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해 리듬 앤 블루스 재단을 설립하는 데 150만달러를 제공했다. 재단의 설립은 루스 브라운과 다른 애틀랜틱 아티스트들이 회사로부터 받지 못한 과거 로열티를 얻기 위한 오랜 싸움에서 비롯되었으며, 다른 레코드 회사들도 나중에 기여했다. 초기 수혜자들 중에는 존 리 후커, 보 디들리, 조니 "기타" 왓슨, 루스 브라운, 스테이플 싱어스가 있었다. 1988년 그는 미국 성취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다.[17]

에르테군은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Make It Funky!''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이 영화는 뉴올리언스 음악의 역사와 리듬 앤 블루스, 록 음악, 펑크, 재즈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18][19]

5. 2.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에 매각

1967년, 에르테군은 파트너 제리 웩슬러가 레이블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에르테군의 형 네수히를 설득한 끝에 결국 동의하여 애틀랜틱을 주식 1700만달러에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에 매각했다.[15] 하지만 웩슬러는 훗날 ''우드스톡'' 영화와 동반 음반을 포함한 자산 때문에 거래가 레이블의 실제 가치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이루어졌다고 인정했다.[15] 웩슬러는 다른 1950년대 독립 레코드 레이블들이 리듬 앤 블루스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에르테군이 백인 록 음악가와 계약하는 선견지명이 애틀랜틱의 지속적인 성공의 기반이 되었다고 말했다.[16]

5. 3. 뉴욕 코스모스 축구팀 공동 설립

에르테군 형제는 북미 사커 리그의 뉴욕 코스모스 축구팀을 공동 설립했다.[15] 이들은 펠레, 카를루스 알베르투,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같은 유명 선수들을 클럽으로 데려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5] 2003년에는 형 네수히와 함께 내셔널 사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7]

5. 4.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및 기타 업적

1987년 에르테군은 자신이 설립자 중 한 명인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7] 같은 해, 보니 레이트 등의 지원을 받아 과소 평가된 블루스 아티스트에게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리듬 앤 블루스 재단 설립에 150만달러를 제공했다.[17] 재단 설립은 루스 브라운을 비롯한 애틀랜틱 소속 아티스트들이 받지 못한 과거 로열티를 얻기 위한 오랜 투쟁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다른 레코드 회사들도 기여했다.[17] 초기 수혜자로는 존 리 후커, 보 디들리, 조니 "기타" 왓슨, 루스 브라운, 스테이플 싱어스 등이 있었다.[17] 1988년에는 미국 성취 아카데미에서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다.[17]

1991년 보스턴의 버클리 음악 대학에서 음악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3년에는 평생 업적을 인정받아 그래미 트러스티 상을 수상했다. 199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10주년 기념 만찬에서는 박물관의 주요 전시관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2000년 미국 의회 도서관은 에르테군을 리빙 레전드로 선정했다. 2003년에는 형 네수히와 함께 내셔널 사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5년 미국 녹음 예술 과학 아카데미는 에르테군에게 최초로 "대통령 공로상 - 산업 아이콘에 대한 경례"를 수여했으며, 뉴욕 국제 센터에서도 뛰어난 업적상을 받았다.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Make It Funky!''에 출연하여 뉴올리언스 음악의 역사와 그것이 리듬 앤 블루스, 록 음악, 펑크, 재즈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인터뷰했다.[18][19]

6. 자선 활동

에르테군은 대중음악계의 주요 인물이자, 미국과 터키 간의 관계 개선과 문화적 이해를 높이는 데 힘쓴 박애주의자였다. 특히 1999년 이즈미트 지진 발생 후 구호 기금 모금에 참여하였고, 프린스턴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줄리아드 학교 등 교육 기관을 지원했다.[20][21]

6. 1. 미국 터키 협회 회장

에르테군은 미국 터키 협회 회장으로서 수많은 미국 고위 인사, 재계 지도자, 투자자, 예술가들을 터키에 소개했고, 터키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었다.[20] 1999년 이즈미트 지진 이후, 에르테군은 협회의 지진 구호 기금에 기여했으며, 이 기금은 터키의 재건 노력, 특히 교육 분야에 400만달러 이상을 모금했다.[20]

에르테군은 미국 터키 협회 활동 외에도, 프린스턴 대학교조지타운 대학교의 터키 연구 학과에 자금을 지원했다. 2008년에는 미국 터키 협회가 설립한 아흐메트 에르테군 기념 장학금이 공식 발표되었으며, 터키계 음악 학생들이 줄리아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정되었다.[21]

6. 2. 지진 구호 기금 모금

에르테군은 미국 터키 협회 회장으로서 1999년 이즈미트 지진 이후 협회의 지진 구호 기금 모금에 기여했다. 이 기금은 터키의 재건 노력, 특히 교육 분야에 400만달러 이상을 모금했다.[20]

6. 3. 교육 분야 지원

에르테군은 미국 터키 협회 회장으로서 수많은 미국 고위 인사, 재계 지도자, 투자자, 예술가들을 터키에 소개했고, 터키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었다. 1999년 이즈미트 지진 이후, 에르테군은 협회의 지진 구호 기금의 성공에 기여했으며, 이 기금은 터키의 재건 노력, 특히 교육 분야에 400만달러 이상을 모금했다.[20]

에르테군은 프린스턴 대학교조지타운 대학교의 터키 연구 학과에 자금을 지원했다. 2008년에는 미국 터키 협회가 설립한 아흐메트 에르테군 기념 장학금이 공식 발표되었으며, 터키계 음악 학생들이 줄리아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정되었다.[21]

7. 2006년 부상과 사망

2006년 10월 29일, 에르테군은 비콘 극장에서 열린 롤링 스톤스 콘서트 도중 넘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22] 그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혼수 상태에 빠졌고, 2006년 12월 14일 와일 코넬 의과대학에서 사망했다.[23][24]

아흐메트 에르테군과 가족의 묘지


에르테군은 12월 18일 터키 출신인 그의 형제, 아버지, 그리고 한때 수피 교단의 지도자였던 증조부 셰이크 이브라힘 에뎀 에펜디 옆, 이스탄불 위스퀴다르 술탄테페에 있는 외즈베클레르 텍케시의 수피 텍케 정원에 묻혔다.

8. 추모 행사

아흐메트 에르테군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여러 곳에서 열렸다. 2007년 4월 17일 뉴욕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고[25], 그의 생일인 7월 31일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비공식적인 추모 행사가 열렸다.[26] 2007년 12월 10일에는 런던O2 아레나에서 추모를 위한 자선 콘서트가 열렸다.[25]

마틴 스코세지의 영화 ''샤인 어 라이트''는 비콘 극장에서 열린 롤링 스톤스 콘서트를 다룬 영화인데, 에르테군은 이 콘서트에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이 영화는 에르테군에게 헌정되었다. 안드레아 코르의 솔로 앨범 ''텐 피트 하이'' 또한 "아흐메트 에르테군의 기억에" 헌정되었다.

워싱턴 D.C.에서는 에르테군 형제가 인종 장벽을 허문 것을 기리기 위해 주미 터키 대사 나미크 탄이 셔리던 서클의 역사적인 저택에서 재즈 콘서트 시리즈를 개최했다. 재즈 앳 링컨 센터와 협력한 "에르테군 재즈 시리즈"는 형제들의 문화 교류 유산을 되살리고,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탄 대사는 국회의원, 행정부 관리, 학계, 언론, 기업 리더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8. 1. 뉴욕 추모 행사 (2007년 4월 17일)

2007년 4월 17일 뉴욕에서 아흐메트 에르테군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렸다. 저녁 시간의 상당 부분은 음악 공연에 할애되었다. 윈턴 마살리스는 재즈 스탠더드 "Didn't He Ramble"로 추모 공연의 시작을 알렸고, 에릭 클랩튼닥터 존은 "Drinkin' Wine Spo-Dee-O-Dee"를 연주했으며, 솔로몬 버크, 벤 E. 킹, 샘 무어, 스티비 닉스,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 필 콜린스 등이 공연에 참여했다.[25]

8. 2. 로스앤젤레스 추모 행사 (2007년 7월 31일)

2007년 7월 31일, 아흐메트 에르테군의 생일에 맞춰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를 기리는 비공식 추모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할리우드의 그라우만스 이집션 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여러 친구들이 그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참석자들은 아메리칸 마스터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Atlantic Records: The House That Ahmet Built''의 특별 상영회를 관람했다.[26] 솔로몬 버크, 제리 라이버와 마이크 스톨러, 키스 에머슨, 피터 애셔, 스펜서 데이비스, 영화 프로듀서이자 오랜 친구인 필 카슨, 테일러 핵포드, 그리고 행사 프로듀서 마틴 루이스가 에르테군에게 직접 추모사를 전했다.[27]

8. 3. 런던 추모 콘서트 (2007년 12월 10일)

에르테군을 추모하기 위한 자선 콘서트가 2007년 12월 10일 런던O2 아레나에서 열렸다. 잉글랜드 록 밴드 레드 제플린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는데, 이는 1980년 드러머 존 보냄 사망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재결합하여 가진 완전한 길이의 콘서트였다. 보냄의 아들 제이슨 보냄이 밴드 공연에서 드럼을 연주했고, 두 곡에서는 백 보컬도 맡았다.

파올로 누티니, 포리너의 믹 존스, 빌 와이먼의 리듬 킹스도 콘서트에 출연하여 공연을 지원하고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 콘서트는 영국, 미국, 튀르키예의 대학교 장학금을 지원하는 아흐메트 에르테군 교육 기금 모금을 위해 열렸다. 원래 11월 말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지미 페이지가 손가락 골절상을 입어 2주 연기되었다.

9. 논란

에르테군은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인정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고, 성추행 혐의도 제기되었다.

9. 1.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관련 견해

음악가 세르지 탄키안(시스템 오브 어 다운)은 에르테군이 터키의 공식 정책에 따라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을 인정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에르테군은 터키 출신이다.[29]

2006년 12월(에르테군의 사망 직후),[30] 아루트 사수니안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작가이자 ''허핑턴 포스트''의 기고가로,[30] 기고문을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에르테군과 대화를 나눴으며 에르테군이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30] 그는 심지어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싶어했다.[30] 사수니안에 따르면 에르테군은 "앙카라가 집단 학살 문제를 뒤로 하고 나면, 그 나라는 국제 사회의 존경을 얻을 것이고 아르메니아의 집단 학살 인정 노력을 막기 위해 노력과 자원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30] 작가는 기고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에르테군이 살아있는 동안 이 기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에 대한 공개 성명 발표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터키 극단주의자들에게 알려 그가 혐오 메일과 위협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 모두에게 큰 손실입니다. 저는 터키에게 더 큰 손실이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에르테군은 집단 학살을 인정함으로써 터키가 많은 정치적 이득을 얻고 실제로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30]

9. 2. 성추행 혐의

2017년, 도로시 카르벨로는 에르테군이 1987년 공개 행사에서 자신의 속옷을 벗기려 시도하고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신체 부위를 만졌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책 '히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는 그녀의 경험을 담고 있다.[31]

참조

[1] 웹사이트 Ahmet Ertegun https://www.rockhall[...] 2018-10-16
[2] 웹사이트 The American Turkish Society https://www.american[...] The American Turkish Society 2018-10-16
[3] 웹사이트 Ahmet Ertegun: America's Greatest Music Man https://www.archbrid[...] 2021-05-20
[4] 뉴스 Rock & Roll Ambassador http://www.saudiaram[...] 2018-10-16
[5] 뉴스 Ahmet Ertegun, Music Executive, Dies at 83. https://www.nytimes.[...] 2006-12-15
[6] 웹사이트 Turkish Embassy in Washington, D.C. http://vasington.be.[...] Vasington.be.mfa.gov.tr 2018-10-16
[7] 뉴스 Atlantic Records founder Ahmet Ertegun signed everyone from Ray Charles to the Rolling Stones and Led Zeppelin https://www.scribd.c[...] 2007-01-25
[8] 뉴스 Maurice Jackson: Remembering the Turkish brothers who helped change race relations in America https://thehill.com/[...] Thehill.com 2013-11-01
[9] 웹사이트 Remembering Ahmet Ertegun and Atlantic's Early Years https://www.bmi.com/[...] BMI 2006-12-20
[10] 웹사이트 Ahmet Ertegun: America's Greatest Music Man https://americanbusi[...] 2021-05-26
[11] 웹사이트 Ahmet Ertegun https://www.telegrap[...] Telegraph 2006-12-18
[12] 서적 The Last Sultan: The Life and Times of Ahmet Ertegun Simon & Schuster
[13] 웹사이트 Mica Ertegun: 'Should I buy diamonds instead?' https://www.telegrap[...] Telegraph 2012-02-29
[14] 서적 The Operator: David Geffen Builds, Buys, and Sells the New Hollywood Broadway Books
[15] 서적 Music Man: Ahmet Ertegun, Atlantic Records and the Triumph of Rock'n'Roll https://archive.org/[...] W.H. Norton & Co.
[16] 문서 Atlantic Records; The House That Ahmet Built
[17] 웹사이트 Golden Plate Awardee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https://achievement.[...]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18] 간행물 IAJE What's Going On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Jazz Educators 2005-04
[19] DVD Make It Funky! Sony Pictures Home Entertainment 2005
[20] 웹사이트 Philanthropist And Prominent Liaison Between The U.S. And Turkey Dies At 83 https://ats.z2system[...] Z2systems.com 2006-12-15
[21] 웹사이트 Scholarship Created to Honor Ahmet Ertegun https://web.archive.[...] 2008-05
[22] 뉴스 Ahmet Ertegun has serious head injury https://www.upi.com/[...] 2006-11-05
[23] 뉴스 Music world legend Ahmet Ertegun on life-support in NYC https://www.hurriyet[...] 2006-12-07
[24] 웹사이트 Music pioneer Ahmet Ertegun dies at 83 https://en.trend.az/[...] 2006-12-15
[25] 웹사이트 Wynton played at Ahmet Ertegun memorial tribute http://wyntonmarsali[...] 2007-04-22
[26] 웹사이트 Atlantic Records: The House That Ahmet Built http://www.pbs.org/w[...] 2007-05-02
[27] 웹사이트 Atlantic Records: The House that Ahmet Built https://web.archive.[...] 2018-10-16
[28] 문서 Notice from St. John's College about exhibit, March 11-April 19, 2015.
[29] 웹사이트 SERJ TANKIAN Tells JIMMY PAGE Man Who Signed LED ZEPPELIN Gave His Philanthropic Support to Denial of Armenian Genocide https://www.blabberm[...] 2021-12-11
[30] HuffPost Ahmet Ertegun Knew What Was Good For Turkey: Genocide Recognition, by Harut Sassounian https://www.huffpost[...] 2006-12-27
[31] 웹사이트 Former Music Executive: 'We Must Come Forward and Name Our Abusers' (Guest Column) https://variety.com/[...] 2017-10-17
[32] Rock and Roll Hall of Fame and Museum Ahmet Ertegun. http://www.rockhall.[...] 2009-04-15
[33] 웹인용 American Turkish Society http://www.americant[...] American Turkish Society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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